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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원의 행복, 그리고 1000원의 눈물

法光 2008. 11. 14. 09:03

1000원의 행복, 그리고 1000원의 눈물

한국일보 | 기사입력 2008.11.14 02:32

 

경제 위기의 파고가 높다. 그 해일에 어디까지 잠길지 가늠조차 어렵다. 불황의 그늘 속에서 꺼내 든 1,000원짜리 지폐 한 장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1,000원은 당신의 무거운 어깨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절망일 수도 있다.

또 당신에게 1,000원은 요긴한 생활 수단일지도 모른다. 때로는 하루를 즐겁게 할 수 있는 행복이자 사치가 되기도 한다. 1,000원을 통해 2008년 11월 한국인의 삶을 살펴보자.

나는 2007년 12월 한국조폐공사에서 태어났습니다. 나는 정말 빳빳하고 향긋한 신권이었지요. 남들은 나를 보며 새해에 세뱃돈으로 풀릴 1,000원 지폐라고 했습니다. 그 때 나는 얼마나 우쭐했는지요. 나를 받아들고 함박웃음을 지을 고사리손을 고대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는 웃음뿐만 아니라 한숨과 조바심, 눈물도 만났습니다.

기억 나는 사람 중 한 명은 1월 나를 내고 달러를 산 어느 아저씨입니다. 그 때 아저씨는 나를 내고 몇 십원을 거슬러 받으며 1달러를 살 수 있었습니다. 이달 우연히 다시 만난 그 아저씨는 나를 보고 분통을 터뜨립니다.

원/달러 환율은 1,300원대. 미국에 자식을 유학 보내고 외롭게 사는 기러기 아저씨는 내가 헐값이 되었다고, 1달러도 살 수 없다고, 나를 원망합니다. 괜히 나도 마음이 무겁습니다.

얼마 전 나를 손에 넣은 아주머니는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고르는 내내 나를 만지작거렸습니다. 아주머니는 정말 고민이 되었나 봅니다. 친환경과일 코너의 신고배 1개 3,980원이라는 표지는 본 척도 않습니다. 1단에 1,180원짜리 포항초 시금치와 1개 1,280원짜리 무 하나가 눈에 들었지만 나를 내고 살 수는 없습니다.

아주머니는 양배추(980원)와 순두부(750원)를 들었다 놨다 하더니 결국 콩나물 한 봉지를 집어들고 나를 계산대에 내밀었습니다. 그날 아주머니는 콩나물을 씻어 콩나물밥을 짓고 간장을 얹어 식구들의 한 끼 식사를 차렸을 것입니다.

가게에서 밤을 지내고 아침 일찍 또 다른 아저씨를 만납니다. 이 아저씨는 지하철을 내리자 지갑에서 나를 꺼내 들고 출근길 아침거리를 찾습니다. 몇 달 전만 해도 1,000원이었던 김밥 한 줄이 이제는 모두 1,500원입니다. 도너츠·커피 전문점의 크림치즈 바른 베이글(2,300원)이나 머핀(2,000은)은 어림도 없습니다.

포장마차에서 파는 계란빵에 시선을 돌립니다. 700원. 한 개로 아침을 대신하기엔 어림없어 보이는데다 자판기 커피(400원)라도 곁들이려니 100원이 모자랍니다. 꼬치에 끼운 어묵 2개를 먹을 수 있지만 싫은가 봅니다. 결국 아저씨는 편의점으로 들어섭니다. 아저씨의 눈은 캔커피(1,000원)와 호빵(700원)을 거쳐 결국 미니 컵라면(800원)에 꽂힙니다.

편의점 계산대 위에서 뒹굴고 있는 나를 본 점원은 신문을 펼칩니다. 심심풀이 삼아 1,000원으로 살 수 있는 주식이 얼마나 될까 주식시세표를 살펴봅니다. 점원은 미국 뮤추얼펀드계의 신화로 꼽히는 존 템플턴을 떠올립니다.

2차대전 직전 폭락한 증시에서 1달러보다 싼 104종목을 100달러어치씩 샀다가 전쟁이 끝난 뒤 보니 3분의 1은 휴지조각이 됐고 3분의 2는 크게 올라 1만달러가 4만달러가 됐다는 이야깁니다.

코스닥시장은 대부분 액면분할주(액면가 500원)라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1,000원으로 살 수 있는 주식이 거의 3분의 1입니다. 네오쏠라나 코어세스와 같은 100원대 주식은 8장까지 살 수 있습니다. 1,000원으로 살 수 있는 게 그렇게 없더니, 여기서는 또 이렇게 지천이라니요! 반토막 난 펀드로 속앓이 할 이들의 심정이 느껴집니다.

오늘 나는 일곱살짜리 아이의 행복이 되었습니다. 할머니로부터 용돈으로 나를 받은 이 아이는 나를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고는 문방구로 달려갔습니다. 아이는 갑작스런 나의 등장 덕분에 공주 스티커로, 막대사탕으로, 캐릭터 연필로 온갖 사치를 부리며 꿈을 꿉니다.

나는 아저씨의 절망이었다가 한 가정의 저녁거리였고 공상이자 꿈이 되었습니다. 지금은요? 나는 지금 어느 돼지저금통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나는 그 누군가의 희망인가 봅니다.

김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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