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는 왜 하는가? (광덕 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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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예배하는가
예배와 감사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행복을 낳고 기적을 낳는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배하고 존경하여야 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런 사람도 있을 것이다. 행복하고 오늘의 고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예배하고 감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런 공리적 타산은 잘 먹혀지지 않는 것이며 우리의 지성이 승복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왜 예경하는 것일까?
한마디로 말해서 불자는 불심으로 보는 것이며 믿음으로 보는 것이다. 불심으로 볼 때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되고 믿음으로 볼 때 부처님의 깨달은 진리의 말씀이 자기의 참 경계가 된다. 부처님의 깨달은 눈에서는 중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기에 경에는 "가히 제도할 중생이 없다."고 말씀한다. 못난 범부 중생이 아예 없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이 보신 바 인간의 실상인 것이다.
그런데 범부들은 이러한 진리에서 밝혀진 참모습을 보지 못한다. 따라서 알지 못한다. 따라서 범부적 현상과 고난과 장애가 겹친 경계만을 보며 그것을 현실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현실은 참 현실이 아니다. 가상적인 현상을 현실이라고 보는 것이 범부이고 진리의 눈에 비친 참모습을 보는 것이야말로 참 현실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무엇을 믿고 어떤 말을 따를 것인가? 범부적인 현상만 을 믿고 그것만이 현실이라고 말하며 그것밖에 없다고 고집할 것인가. 그런 사람은 진리의 참모습을 말하면 믿지 않는다. 이와 같이 진리를 보지 못하는 망령된 고집에서 중생들의 고통이 생기게 마련이다.
고를 여의고 싶거든 진리대로 살고 싶거든 거짓없이 자기생명에 순수하고, 진실하게 살고 싶거든 모름지기 깨달은 진리의 말씀을 믿고 따를 수 밖에 없다. 믿고 따르기 싫으면 스스로 깨쳐 진리의 안목을 이루어야 한다.
불자는 부처님의 진리의 말씀을 믿는 자다.
물론 진리를 믿고 행하므로 행복의 창조가 있고 기적적인 장애극복이 있다. 그러나 불자는 기적을 위해서나 행복하기 위하여 그것 때문에 부처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말씀에서 우리들의 진실 생명을 보고 모든 이웃의 진실한 가치를 믿음으로 보기 때문이다 . 이 진리인 현실을 자기의 참 현실임을 인정하고 생활하게 되므로 결과적으로 행복의 창조가 있고 기적의 성취가 있게 되는 것이다.
고난의 회피라든가 장애의 극복이라든가 소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것때문에 모든 사람을 예배하며 감사한다는 것이 아님은 얼마간 이해가 되었을 줄 안다. 사실 공리적 타산적 목적에서 예경한다는 것은 이것은 예경이라 하기에 좀 쑥스러운 것이다. 자기 목적달성을 위해서 남을 이용하고 추켜세우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서는 진정한 예경과 진정한 공경심이 우러나지 않는다. 우리들은 우선은 고를 피하기 위하여 염불하지만 불자의 염불은 불심의 발현을 의미하듯이 우리의 감사 예배행도 이러한 자각적인 진실자기의 전개라는 깊은 존재의식에 근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독경 염불 예경하라
그러나 이러한 이해가 한낱 아는 것으로 그치고 말 때 거기에는 아는 것과 보는 것과의 사이에 차이가 벌어진다.
그러므로 참으로 진리를 행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게 되고, 현실적 경계를 당하여도 현상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진실한 믿음 그대로 보고 행하게 되자면 불가불 수행이 있어야 한다. 그 수행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첫째로 말해 둘 것은 진리를 말씀하고 있는
그 다음에
다음에는
이와 같이 독경하고 염불하고 예경 수행하면 망념은 사라지고 가슴 속에 가득히 공덕심이 차온다. 거기에서 존경과 감사는 자신의 깊은 생명의 흘러남으로 행하여지며 안과 밖이 없이 대하는 사람마다 경건과 진실과 존경이 저절로 흘러 나오게 된다.
광덕스님 행복의 법칙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