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향기/大德스님 법문

경봉스님 말씀

法光 2009. 10. 4. 03:24



경 봉(鏡鋒)스님 말씀 제 1 집 (1). 법문(法文)은 아무말도 하지않는 가운데 있고 종사(宗師)가 법좌(法座)에 오르기전에 법문이 있고 법문 듣는사람이 자리에 앉기전에 있고 종사(宗師) 가 무었을 말하려는가 하는 한생각 일어나기전에 있는 것이다. 이 도리를 바로알면 되는데 그것을 모르니 부득이 해서 입을 열어 무슨말 을 하게 되고 들어야 하는데 교가(敎家)에서 경(經)을 보고 말하는 것과 선 가(禪家)에서 조사종풍(組師宗風)을 드날리는 선리적(禪理的)인 법문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白雲消散(백운소산)하고 紅日東昇(홍일동승)하니 仰面看天(앙면간천)하고 低頭처地(저두처지)하야 東西南北(동서남북)을 一任觀光(일임관광)이어라. 흰 구름이 모두 흩어 지고 날이 따뜻해지니 작년에 눈이오고 얼었던 얼음 도 봄 바람이 불고 비가오니 다 녹아버린다. 붉은 해가 동녘에서 솟아올라 낯을 우러러 하늘을 보고 또 머리를 낮추어 땅을 보고 동서남북을 임의대로 맡기니 마음대로 불지어다. 누구든지 산을볼때에 산이 푸르고 물을 볼때에 물이 푸르게 흘러 내려 가지 만 수행이 그 어느단계에 올라가면 산을 봐도 산이아니요 물을 봐도 물이아 니다. 진리를 탐구하고 수양을 해야 이 말이 통하지 자기 심리를 닦지않는 사람 은 무슨 말인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을 귀에다 담아놓으면 금강쇳덩이를 먹 음은 것과 같아서 이것을 깨달을 때에는 그 말에 계합(契合)하게 된다. 그러니 이게 산을 봐도 산이아니오 물이 물이 아니라 산이 곧 물이오 물 이 곧 산이더니 한층 더 나아가서는 산은 이 산이요 물은 이 물이니 이또한 오묘한 도리인 것이다. 천경만론(千經萬論)을 봐도 내 자성(自性)자리를 닦아 견성성불(見性成佛) 해서 중생교화(衆生敎化)를 하라는 말뿐이다. 우리가 이 몸을 애지중지 하지만 이론적으로 과학적으로 생리적으로 따저 봐도 부모님의 물건이지 내물건이아니다. 참으로 나라(진아=眞我)고 할 수 있는 것은 이몸을 운전하고 다니는 소소영영(昭昭靈靈)한 그 자리가 곧 나 의 이몸을 운전하고 다니는 운전수요 나의 주인공이다. 그러니 이것을 모르 는 것은 흡사 남의집에 하룻밤을 자도 주인을 안찾아보면 무례한 사람이 되 는 것처럼 몇 십년을 끌고 다녀도 주인을 못찾아보고 또 설사 찾을려해도힘 드는 것이다. 석가여래(釋迦如來)께서도 왕위(王位)를 버리고 설산(雪山)에 들어가 이 자리하나 밝혔다. (계속) - 鏡鋒스님말씀 第1.2,3輯 發行處: 極樂護國禪院信徒會 通度寺 極樂禪院 - 나무 석가모니불 합장_()_ [경봉(鏡峰)스님 (1892∼1982)] 현대의 고승. 광주김씨. 속명은 용국(鏞國). 호는 경봉(鏡峰), 시호 (諡號)는 원광(圓光). 경상남도 밀양출신. 아버지는 영규(榮奎)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 이다. 7세 때 밀양의 한학자 강달수(姜達壽)에게사 서삼경을 배웠으며, 15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난뒤 1907년 6월에 출가 하여 양산 통도사 성해(聖海)의 제자가 되었다. 1908년 3월 통도사에 서 설립한 명신학교(明新學校)에 입학하였으며, 그해 9월 통도사 금강 계단(金剛戒壇)에서 청호(淸湖)를 계사(戒師)로 사미계(沙彌戒)를 받 았다. 1912년 4월 해담(海曇)으로부터 비구와 보살계를 받은 뒤, 통도 사 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하여 불경연구에 몰두하였다. 하루는 불 경을 보다가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반푼어치의이 익이 없다(終日數 他寶 自無半錢分)."라는 구절에서 큰 충격을 받고, 참선공부를 하기 위하여 내원사(內院寺)의 혜월(慧月)을 찾아 법을 물 었으나 마음 속의 의문을 해결 할 수 없었다. 이에 해인사 퇴설당(堆 雪堂)으로 가서 정진한 뒤,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석왕사(釋王寺)등 이름난 선원을 찾아다니면서 공부하였다. 이 때 김천 직지사에서 만난 만봉(萬峰)과의 선담(禪談)에 힘입어 '자기를 운전 하는 소소영영(昭 昭靈靈)한 주인'을 찾을 것을 결심하고, 통도사 극락암으로 자리를 옮 겨 3개월 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하면서 정진을 계속하였다. 이와 함께 화엄산림법회(華嚴山林法會)에서 법주(法主) 겸 설주(說 主)를 맡아 철야로 불사하고 정진하던 중, 4일 만에 천지간에 오롯한 일원상(一圓相)이 나타 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물(一物)에얽 힌 번뇌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음을 스스로 점검하고 다시 화두(話頭 )를 들어 정진하다가 1927년 11월 20 일 새벽에 방안의 촛불이 출렁이 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 1930년 2월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의 원장 으로 취임한 뒤부터 50여년 동안 한결같이 중생교화의 선구적 소임을 하였다. 1935년 9월에는 통도사주지, 1941년 3월에는 서울 안국동에있 는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朝鮮佛敎中央禪理參究院) 이사장, 1949년 4월에는 다시 통도사주지를 역임하면서, 전국의 선승들을 지도 하여 선풍(禪風)을 선양하였다. 1953년 11월에는 통도사 극락호국선원 (極樂護國禪院)의 조실(祖室)로 추대되어 입적하던 날까지 이곳에서설 법과 선문답으로 법을 구하러 찾아오는 불자들을 지도하였고, 동화사 (桐華寺)·내원사(內院寺) 등 여러 선원의 조실도 겸임하여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언제나 온화함과 자상함을 잃지 않았고,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며, 꾸밈없는 활달한 경지에서 소요자재(逍遙自在) 하였 으므로 항상 열려진 문호에는 구도 자들이 가득하였다. 82세부터는 매월 첫째 일요일에 극락암에서 정기법회를 열었다.90세 의 노령에도 시자(侍者)의 부축을 받으며 법좌에 올라 설법하였는데, 매회마다 1,000여명 이상의 대중들이 참여하였다. 또한 가람수호(伽藍 守護)에도 힘을 기울여 통도사의 삼성반월교(三星半月橋)와 장엄석등 (莊嚴石燈) 18좌(座)를 세웠고, 극락암 조사당의 탱화조성 및 추모봉 행, 특별 정진처인 아란야(阿蘭惹)의 창건, 극락암 정법보각(正法寶閣 ) 신축 및 무량수각(無 量壽閣)의 중창 등을 주관하였다. 이밖에도 경 봉장학회를 설립하였으며, 파고다 공원안에 만해선사기념비 건립도 추 진하였다. 또 18세 때부터 85세까지 67년 동안 매일의 중요한 일을 기 록한 일지를 남겼는데, 이 일지에는 당시의 사회상과 한국불교 최근세 사가 그대로 담겨 있다. 1982년 7월 17일에 미질을 보인 뒤 문도들을 모아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법어집인 <법해(法海)>·<속법해 (續法 海)>와 시조집인 <원광한화(圓光閒話)>, 유묵집인 <선문묵일점(禪門墨 一點)>, 서간집인 <화중연화소식(火中蓮花消息)> 등이 있다. - 검색에서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