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반영하는 불제자들의 행위
대승, 소승, 선불교는
시대를 반영하는 불제자들의 모습이다.
그곳에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변한 것은 없다.
무를 하나 가지고
국도 끊이고
나물도 해먹고
김치도 담아 먹는 것과 가트다.
그렇다고 무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보통
대승이니 소승이니 선불교니 하면서 구별 짓는 것은
불교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석가모니의 사상과 가르침을 이어 오는 과정에서
그 불제자들의 행위와 생각이
그 시대의 신앙과 사회 환경의 변화에 따라
수행 형태가 나타난 것뿐이다.
부처님 당시는
대승도 소승도 선불교를 따로 세우지 않았다.
근본불교
우리가 보통 지금에 와서 근본불교라고 분류하는 시기는
부처님 성도 후 입멸까지
그리고 입멸 후 30년 동안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행위를 받들었던 불제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직접 받으면서 실천하지 않았나.
해서 근본불교라고 지칭한다.
부파불교
부처님 입멸 후 100년에서 200년 사이
이 시기부터는
부처님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교단을 운영하게 된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의 향기가 제일 많이 남아있던 시기가 아니겠느냐
해서 원시불교라고 분류한다.
그러면서 이때부터
그 불제자들 개개인의 독특한 행위나 성격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래 이 시기를 부파불교 시대라고도 한다.
소승(상좌 불교)
소승이라는 말은
대개 부처님 입멸 후부터 부파불교까지의
불제자들의 행위가 자기 하나밖에 모르는 작은 수레와 같다.
해서 소승(小乘)이라 부른다.
이의 원인은
부처님을 믿고 따랐던 제자들이
부처님이 가르침대로 믿고 따르면 다 되는 것으로 생각했지
자기들이 부처님의 행위까지 떠맡아 중생을 구제한다든가
불교의 교세를 새롭게 펼쳐야 하겠다는
사명의식 같은 것은 희박했던 것이다.
이러한 행위에 대해서 반박하고 나온 것이
일반 대중의 불제자들이다.
그래 저들(소승)은 중생의 고통은 생각지 않고
자기들만의 안일에 빠진 작은 수레의 무리다.
즉 소승이다.
하고 비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들은 부처님을 사모하는 무리로서
승가가 아닌
불사리 탑 중심으로 모여서
자기들이 부처님에게 직접 접했던 모습이나 이야기
또는 그 제자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을 서로 주고받으며
자기들을 이끌어줄 지도자를 갈망하기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 갈망의 무리 속에 출가승들 가운데에서도
일부 호응하면서 나타난 것이 대승이다.
이 대승의 생각은 정각을 이루었다고 해도
누구나 석가모니와 같이 중생구제에 솔선수범하는 게 아니라
전생부터 중생을 구제해야 하겠다고 서원을 세웠기에
석가모니와 같은 분이 나타난 것이다.
또한, 그렇게 규정지으면서 서원불교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서원을 가진 자들을 보살이라 칭하기 시작했다.
그래 대승불교의 탄생은 보살불교라고도 할 수도 있다.
여기서 대승이니 소승이니 하는 것은
부처님 경전에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가르침을 받아서 실천하는 불제자들의 행위에서 나타난 말로서
불법의 차별을 두는 것은 아니다.
지금 현재 대승불교 국을 자칭하는 한국에서도
이 문제가 사회적으로 많이 제기되고 있다.
왜 스님들이 산속에만 처박혀 있느냐.
왜 스님들이 막행막식을 하느냐.
하는 말들이 모두 여기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불교의 최고 장점은
석가모니라든가
대승 소승 할 것 없이
또한 불교라는 언어 자체까지도
절대적 규정을 두어 고정시키지 않는 데 있다.
누가 말을 해서 참이고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떠한 것이
우주 속에 존재하는 이치를 총동원해서도
바르고 참다운 것이냐 하는 것이다.
불교는 자기 것이니까
진리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보편적이며 전체적인 이해를 기준으로 삼고
그것이 구태여 불교라 이름하지 않아도
편협 되지 않아
보편적이고 전체적이면 된다.
오직 지금까지 이 보편적이고 전체적인 우주의 실상을
불교가 중심이 되어 이끌어 왔기에
반야라든가 불성, 진여, 연기 등의
언어들이 불교에 있을 뿐이다.
작금 한국불교는 선불교가 중심이다.
이 선불교라고 하는 것도
불교의 절대적인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삼천여 년 동안 내려오면서
절대적 진리에 들어가는 길을 보충하고 다듬으면서
그 방법을 나타내는 것일 뿐
그 자체가 진리인 것은 아니다.
불교는
빠알리 경전, 아함경, 금강경. 아미타경, 법화경, 화엄경 등
팔만 사천이 다 합쳐서 하나의 경전을 이룬다.
하나도 소홀한 것도 없고, 뒤진 것도 없다.
개개인의 취항에 맞추어서
소유경전으로 삼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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