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불자의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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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들어가는 말
Ⅱ. 행복한 불자의 가정
1. 가족과 가정의 의미
2. 행복이란 무엇인가?
3. 행복한 불자가 되려면
4. 행복한 불자의 가정
Ⅲ. 나아가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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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들어가는 말
여러 불자님! 반갑습니다.
거룩하신 부처님과 거룩하신 부처님의 가르침과 거룩하신 스님들께 귀의하옵니다.
대지의 모든 생명들이 모두 그들 나름대로 자기의 해야할 일을 열심히 진행하여 산야에서는 이제 동면을 깨고 푸른 생명의 빛을 발하려하고, 바다는 쉼 없이 모든 부정한 것들을 정화하여 무수한 생명들의 터전이 되어지고 있습니다. 이에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은 생명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또 우리 인간의 삶도 각기 나름대로 자기의 맡은 바 일들을 하면서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존재들은 각기 존재의 실상에 동참하여 만족해하면서 행복한 삶을 사는 듯합니다.
그런데 우리 불자들은 어떻습니까? 모두들 행복하십니까? 아니면 불행하십니까? 그것도 아니면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합니까? 그것도 아니면 행복하지도 않고 불행하지 않습니까? 어찌 대답들이 시원스럽게 나오지를 않는 것 같습니다. 아마 여러 분께서는 행복이란 단어를 충족시키기 위해 이 인터넷 공간에 오시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그 해답에 관하여 생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의 삶은 이 행복을 얻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도 이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해 출가 하셨고 그것을 발견하여 가르침으로 제시하셔서 전하게 하신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면 과연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우선 이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대답을 하려고 들면 무한한 우주와 우리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만큼이나 많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모든 존재들의 행복을 말하다 보면 아마 평생 아니 이 우주가 다하도록 말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는 제각기 그 습성이 다르기 때문에 그들의 행복을 알기도 어렵고 또 말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아마 부처님만이 아시는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지구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 가운데에서 불자의 행복한 삶으로 축소시켜서 얘기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얘기를 진행시켜 감에 있어서 먼저 오늘의 주제를 "행복한 불자의 가족"이란 대주제 아래 소제목으로 먼저 가족과 가정의 의미란 무엇인가를 간략히 살펴서, 다음에 인간의 행복이란 개념을 일반적으로 말해지는 의미와 {숫타니파다}에서 부처님께서 제시하신 최상의 인간 행복을 살펴보고, 그 다음에 불자의 참다운 마음가짐을 상고해 보면서 행복한 불자가 되려면 어떠한 가치관과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고, 끝으로 행복한 불자의 가정이란 어떤 가족인가를 언급하여 결론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Ⅱ. 행복한 불자의 가정
1. 가족과 가정의 의미
여러 분께서도 잘 알고 계시다시피 가족이란 사회 구성원의 최소 집단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가족들이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구성공간을 가정이라고 하지요. 이 두 가지는 거의 같은 의미인데 가족은 유형적인 제도를 말하는 것이고, 가정이란 그 기능까지 포함한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의 가족들은 옛날 대가족에 비해서 오늘날은 아주 단순화되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야기되는 문제점들도 많고 또 좋은 점도 많아졌습니다. 어느 가족 형태가 좋다고 말하기엔 좀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 이를 유형별로 보면 근친관계를 중심으로 하여 구성되는 최소의 거주집단을 말하는데, 이러한 최소 거주집단을 과거에는 개별가족(individual family) 또는 기본가족(elementary family) 등으로 불렸으나, 최근에는 미국의 인류학자인 G.P. 머독이 제창한 핵가족(核家族 ; nuclear family)이란 명칭을 사용하여 널리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부만이 사는 부부가족제(conjugal family), 결혼한 한 자녀와 사는 직계가족제(stem family), 또 자녀들이 결혼을 하였지만 여러 자녀들이 함께 모여 사는 복합가족제(compound family) 등이 있습니다. 하여튼 우리나라는 현재 거의 핵가족으로 살아가고 있지요.
또한 그 기능 면에서 보면 가족은 예로부터 가족 구성원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사회의 유지와 발전에 관계되는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해 왔습니다. 이러한 기능은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어떤 기능은 약화되고 어떤 기능은 강화되기도 하였습니다. 일반적인 가족의 기능으로는 먼저 자녀출산의 기능, 다음에 양육과 보호의 기능, 셋째로 정서적 기능, 넷째로 경제적 기능, 다섯째로 욕구충족의 기능, 여섯째로 사회화 기능, 일곱째로 교육적 기능, 여덟째로 오락적 기능, 아홉째로 종교적 기능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에는 사회적 역할이 확대되고 여러 제도의 발달로 교육이나 오락, 종교적 기능들은 점차 축소되어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가족의 기능은 사회의 변화에 영향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 기능을 원활하게 수행함으로써 사회의 유지와 발전에 기여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사회에 새로운 구성원을 공급함으로써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되며, 노약자에게 안락한 환경을 제공하여 사회복지에 기여하기도 합니다. 또한 경제적 기능을 바람직하게 수행함으로써 사회의 소비구조를 건전하게 하고, 나아가 산업사회의 생산구조에 발전적인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더욱이 가족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기본단위이므로 가족이 건강하고 행복한 가족생활을 영위하는 것은 사회를 건전하게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됩니다. 이 가운데 제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종교적 기능과 교육적 기능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종교와 교육이란 인간이 잘 살아갈 수 있는 가장 근원적 기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 보는 가족의 기능을 어떻게 보아야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고(古) 광덕스님의 말씀을 빌어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불교에서는 하나의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그 사람이 거룩하게 되고 행복하게 되며, 진리를 깨닫는 지혜와 능력을 회복하여 밝은 창조의 힘을 발휘하게 하고, 그것이 가정이나 사회나 나라에 행하여질 때 평화와 번영이 깃들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중생성숙·불국토 건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부처님의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불국토 건설의 모든 환경은 우리의 마음과 행동이 만드는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가짐과 행동에 따라서 육체라는 환경까지도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불자는 이 나라를 보살이 사는 부처님 나라로 만들 것을 부처님으로부터 부촉받은 사람들이기에 불국토 성취의 임무가 있으며, 보살불국에는 불자 개개인의 가정이 그 터전이 됩니다. 가정은 온갖 고난을 박차고 평화와 번영을 만들어 갈 지혜도 용기도 샘솟고, 거친 세파에 시달린 영혼들이 안식을 얻으며 치유를 얻고, 새 희망을 키워 가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가정은 생명의 보금자리이며, 힘의 근원이며 부처님 나라는 여기에서 꽃이 핍니다. 이러한 가정이 진리의 바탕에서 이루어져 가고, 진리로서 굴러갈 때 거기서 부처님 나라의 행복이 솟아나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정 속에서 피어낼 때 우리의 생명, 우리의 생활, 우리의 사회가 향기롭고 따뜻하고 활기차게 됩니다. 한 집안의 가장과 주부, 또 자녀들에게 주어진 환경이 어떤 것이든 그 일차원적인 원인이 자기의 마음 씀씀이와 행동에 있다는 것을 불자는 알고 있기에 자기 마음을 고치고 행동을 고침으로써 환경을 바꾸는 것입니다. 결코 자신에게 책임이 없어 보이는 운명적인 것이라도 역시 원인의 최종적 설계자는 자기인 것을 지혜의 눈은 보아내는 것입니다. 결국 불자는 가정을 불토화 함으로써 사회와 나라를 불국으로 가꾸게 됩니다.
2. 행복이란 무엇인가?
먼저 일반적인 의미의 행복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면 인간은 살아가는 과정에서 갖가지 욕구를 가지며, 그것이 충족되기를 바라는데, 그러한 욕구가 충만하여진 상태 또는 그때에 생기는 만족감을 인간은 누구나 행복이라 말하고 추구하지요. 그러나 사람이 어떠한 욕구의 만족을 구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행복의 내용 또한 가지각색으로 바뀌게 됩니다.
먼저 고대 서양에서 감성적 욕구의 만족에서만 행복을 구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쾌락주의자로 불리었습니다. 이 경우 행복이란 감성적 쾌락으로, 고대 그리스의 에피쿠로스가 이러한 종류의 쾌락주의를 주장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 자신들은 반대로 참다운 행복은 어떤 욕구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경지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경우 우리 동양에서는 불교의 깨달은 경지라든가 도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의 경지가 여기에 가깝다고 하겠지요. 물론 유교에서는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이였지요.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감성적 욕구의 만족이 아니고 정신적 안정을 구하는 욕구의 만족입니다. 스토아학파 사람들도 이성의 지시에 따라 자신을 다스리는 극기(克己)나 금욕적(禁慾的)인 삶에서 행복을 발견하였습니다. 스토아학파에 한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자신의 인격적 완성에 정신적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감성적 쾌락을 낮은 차원의 행복으로 여기며 그것을 부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편 근대에서의 관심은 인류 전체의 행복을 중시하고 촉진한 윤리설도 가졌습니다. 예를 들어 공리주의에 따르면 윤리적으로 좋은 행위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구하는 행위이죠. 이 행복에는 감성적 쾌락 외에 여러 가지 정신적 쾌락도 포함되지만, 실제로 다종다양한 쾌락의 총화를 계산해 내기란 어려운 일이며, 이러한 공리주의 원칙은 쾌(快)의 증대보다 불쾌(苦)의 감소에 적용되었습니다. 즉 지상에서 인류의 불행을 가능한 제거하여 인류의 질적인 행복 증대로 이어진다는 견해입니다. 마르크스주의에서도 이런 종류의 견해가 모양을 바꾼 상태로 발견됩니다.
그런데 현대에 행복을 추구하는 성향을 보면 인간은 자본주의와 개인주의 가치관아래 포스트모던적 탈중심화의 추구와 인터넷과 매스미디어를 통한 엄청난 정보통신(IT)의 발달로 시각과 청각, 그리고 지각과 육감을 총동원한 감각적 만족도를 최대한 추구하면서도 순간적 쾌락에 그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인류의 다양한 행복의 추구의 견해와 더불어 우리 불교가 지향해야할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3. 행복한 불자가 되려면
부처님 당시 재가제자로서 이름난 파사익 왕에 관해서 {잡보장경}에는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해집니다. 파사익 왕의 딸 중에 '뢰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너무나 얼굴이 못나고 무섭게 생기기로 소문난 여인이었습니다. 이 딸이 장성하자 파사익 왕은 한 청년을 왕궁에 불러들였습니다. 그는 이름난 장자집안의 출신이었는데 그때는 가운이 기우러져 걸인 행세로 지냈습니다. 왕은 청년에게 왕녀를 아내로 맞아 달라고 부탁하고 인물이 못났으니 결코 집밖에 나오지 못하도록 당부하였습니다.
그 결과 청년은 장자들 틈에 함께 어울려 지내게 되었으나 아내를 동반하는 모임에는 일제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청년이 몇 번인가 부부동반 약속을 어겨 처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알고 그 여인은 매우 근심하고 슬퍼한 나머지 부처님을 향해서, '세상에는 부처님이 나시어 모든 사람이 은혜를 입는다 하는데 나는 버려진 몸인가?'하면서 일심으로 간절하게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여인의 지성이 간절한 것을 부처님은 아시고 그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여인은 지상으로 솟아오르는 부처님을 보았습니다. 처음 머리를 보고 크게 감사하고 기뻐하였습니다. 다음에 이마를, 눈썹을, 눈, 귀, 코를 다음에 상반신과 하반신을 보았습니다. 여인은 뛸 듯이 기쁨에 차 그 심정을 어찌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기뻐함을 따라 자기의 형상과 용모가 바뀌었고, 부처님을 다 보았을 때는 천상의 여인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부처님을 일심으로 지극한 정성을 바쳐 생각하고 환희한 결과는 그녀의 몸과 마음이 천인(天人)으로 바뀌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여인의 변화를 대하면서 깊이 깨닫는 점이 있을 것입니다. 감사하고 환희에 넘치는 마음일 때 용모가 바뀌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부처님을 일심으로 간절하게 생각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의 변화가 형상을 바꿀 뿐만 아니라 환경을 바꾼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마음의 기쁨뿐만 아니라 그밖에 행복한 생각을 일으켜 감사하고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의 마음세계에 행복의 종자를 심고 자신의 환경과 이웃에게 행복의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행복감으로서 우리가 감사하고 환희에 차 있을 때 자신과 이웃이 함께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반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불행한 생각이 자신과 이웃과 환경에 불행을 불러들인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불행을 생각하거나 고통을 마음에 두고 슬퍼하고 있을 때 우리의 마음세계에 불행의 씨앗을 뿌리고 환경과 이웃에 불행한 분위기를 만들어 더럽힙니다. 그럴 때 그 영향을 받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온갖 조건에 대하여 반항하고 부정적이고 반감을 갖는다는 것도 재고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과 가족과 이웃과 온 누리 국토를 위해서 일심으로 염불하고 행복을 생각하며 감사하고 환희하는 마음에 있는 것임을 명심하여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나 대하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립하고 저항하는 감정일 때 자신과 이웃에 불행과 어둠을 뿌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사에 모든 사람을 자비로 대하고 정성들이여 지성을 기울이고 모두가 부처님에게서 온 크신 은혜인 것을 생각하고 깊이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자비와 지혜로운 환희로 마음을 채웠을 때 우리와 환경에 온갖 행복요건이 주어지고 성장하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4. 행복한 불자의 가정
그러면 부처님께서 제시하신 최상의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서 저 유명한 {숫타니파다}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거룩하신 부처님께서 어느 날 사밧티의 제타 숲, 고독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는 장자의 동산에 계실 때였습니다. 그 때 용모가 단정한 한 신이 밤중이 지나 제타 숲을 두루 비추면서 부처님에게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예배한 후 한 쪽에 서서 시로서, "많은 신과 사람들은 행복을 바라면서 행운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으뜸가는 행복을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시로써 답하십니다.
* 어리석은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말고 어진 이와 가깝게 지내며,
존경할 만한 사람들을 존경할 것, 이것이 최상의 행복이다.
* 자기에게 알맞은 곳에 살고, 일찍이 공덕을 쌓았고,
스스로는 바른 서원을 하고 있는 것, 이것이 최상의 행복이다.
* 박학과 기술과 훈련을 쌓고,
그 위에 언변이 능숙한 것, 이것이 최상의 행복이다.
* 부모를 섬기는 것, 처자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
일에 질서가 있어 혼란하지 않는 것, 이것이 최상의 행복이다.
* 보시와 이치에 맞는 행위와 친척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과,
비난을 받지 않는 행위, 이것이 최상의 행복이다.
* 악을 싫어해 멀리하고, 술을 절제하고,
덕행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 이것이 최상의 행복이다.
* 존경과 겸손과 만족과 감사와,
때로는 가르침을 듣는 것, 이것이 최상의 행복이다.
* 인내하는 것, 온순한 것, 수행자들을 만나는 것,
때로는 이치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것, 이것이 최상의 행복이다.
* 수양과 깨끗한 행위와 거룩한 진리를 보는 것,
안정(열반)을 입증하는 것, 이것이 최상의 행복이다.
* 세상 일에 부딪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걱정과 티가 없이 안온한 것, 이것이 최상의 행복이다.
* 이러한 일을 한다면 어떤 일이 닥쳐도 패하지 않는다.
어느 곳에서나 행복할 수 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최상의 행복이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최상의 행복이고, 우리가 이 가르침에 따라서 살아가면 최상의 행복을 얻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은 혼자만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만남이 소중하고 그 만남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그 첫 번째 만남이 가족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정말 좋은 가족이 있습니다. 그런 가족은 아마 이런 가족일 것입니다. 즉,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거나 탐스러운 과일이 달린 나무 밑에는 어김없이 길이 나 있습니다. 사람들이 저절로 모여들기 때문이죠. 그와 마찬가지 생각하는 것이 아름답고 향기가 나는 가족에게 사람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내가 좀 손해 보더라도 상대를 위해 아량을 베푸는 너그러운 가족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은은한 향기가 풍겨져 나오는 가족들입니다. 이런 가정들은 언제나 화목하고 사회에 봉사를 생활화하면서 이웃의 어른을 공경하는 가족입니다. 그런 가족을 만나면 늘 함께 있고 싶어집니다. 왜냐하면 그런 가족의 향기가 온전히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배어져서 그 향기가 누군가에게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Ⅲ. 나아가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가족과 가정, 그리고 행복, 행복하려면, 행복한 가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끝으로 우리는 삼귀의를 소리 높이 제창하고 혹은 염불하고 독경하며 참선하고 혹은 부처님과 보살님께 백배, 천배, 삼천배, 만배 등의 참회와 예경도 드립니다. 그리고 스스로 내가 불자라는 드높은 긍지로 지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들은 불자로서 참으로 부처님과 가까이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스스로 불자로 자처하면서 기실은 부처님과는 먼 거리에서 헤매고 있지는 않는가?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옷자락을 붙잡고 뒤를 따르며 나의 발자국을 밟으며 걷더라도 만약 그가 욕망 때문에 격정을 일으키고 성내는 마음을 그 속에 품으며 삿된 생각에 사로잡히고 방일하여 깨달음이 없어 미혹해 있다면 그는 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자이다…그는 법을 보지 못하며 법을 보지 못한 자는 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부처님 말씀을 멀리하는 요건 네 가지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는 격한 탐욕에 사로잡혀 욕심으로 취할 줄만 아는 탐욕스럽고 인색한 삶입니다. 둘째는 불꽃같은 성내는 마음을 안에 품고 미움과 분노와 공격적 성향입니다. 셋째는 견해가 바르지 못하여 정법을 믿지 아니하고 원망 질투하는 삶입니다. 넷째는 방종한 삶입니다. 우리의 생활을 돌이켜 보아 위 네 가지를 잘 살펴야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자칫 타성에 젖어, 또는 현실 생활에서 부득이하다느니, 이 정도는 무난하다느니, 때로는 본래 상(相)이 없는 것이라 걸림이 없다느니, 온갖 말로 자기를 합리화하여 삼독심(三毒心)에 관대하거나 무심하지는 않은가 살필 일입니다.
우리들은 기도로써 소망을 이루고 우리의 환경을 바꾸어 가며 우리의 의지를 삶의 현장에 펼쳐나갑니다. 그 사이에 순탄한 환경도 만나지만, 고난과 장애도 숱하게 만납니다. 우리의 기도는 순탄하고 기쁜 일을 만나서 하는 감사기도도 있지만 그보다도 어려움을 만나서, "부처님이시여! 이 고난을 없이 하여 주소서!"하는 기도가 더 많지는 아니한가 생각해 봅니다.
돌이켜 보면 확실히 우리들은 감사의 기도보다 고난을 만나서 기도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예로부터 괴로움을 당하여 비로소 발심(發心)한다는 말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불행이 원래 없는 부처님이 주신 은혜의 세계임을 모른다면 그것은 참된 기도가 되기 어려운 것입니다. 부처님 앞에 "이러이러한 불행을 없게 하여 주소서!"하는 기도를 한다면 그것은 불행이 참으로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상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인생의 행복과 성공을 이루려면 무엇보다 불행과 불완전은 진실에 있어서는 없다는 것을 먼저 확신하여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나타나면서 사라져 가는 하나의 현상일 뿐입니다. 부처님의 국토는 완전하고, 원만하며 더 없이 행복한 곳입니다. 거기에 털끝만한 결함도 불행도 있을 리 없습니다. 그리고 부처님 국토의 한량없는 공덕은 우리 가족과 가정, 사회와 국토, 우리 생명 모두에게 충만되어 있는 부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우리 불자가정의 원래의 모습이며 참된 행복자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원래로 행복한 존재인 것입니다.
- 끝가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마하반야바라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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